고독의 방식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이 공간을 사랑하는 몇 몇 사람들이 보이는 창문 안쪽 작은 방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의식하면서 글을 쓰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를 의식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질 듯 하다. 내 목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리든 들리지 않든, 작게 들리든, 내 말을 함으로서 나 또한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소리 또한 선택적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그런 방식이 나에게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쫓기듯 이 곳에 왔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곳에 온 뒤로 그리움 자체를 그리워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그리워 할 어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그리움은 그것의 한 방편으로 여겨진다. 고독은 외로움을 느끼고자 하는 그런 서투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별다른 보탬이 되지 않는다. 고독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이다. 감정은 고독에 부분적으로 동기가 될 수는 있으나, 하나의 가치를 삶의 방향으로 선택함에 있어서 감정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의지가 필요한 감정들이 유독 그렇다. 관계에 있어서 고독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 둘은 온도가 다를 뿐 같은 열정이며, 열정이 가치로 이동할 때 우리는 어떤 충만감을 느낀다.

이 곳에 온 이후로, 줄곧 내 욕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 원하는 것 같지만 뒤틀린 것, 원하지만 앞으로 원하지 않을 예감,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원하는 것, 원했지만 수없이 뒤틀렸고, 지금도 원하지만 계속해서 뒤틀리고 있는 것 등을 생각한다. 그리고 욕망과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혹은 드러나 보이는 척 하는) 멀쩡한 얼굴들-가치나 인격-에 대해서 생각한다. 결핍된 욕망을 바깥으로부터 채우려고 할 때, 그 얼굴은 거울이 되어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것들을 튕겨 보낸다. 결국 그 누구도 (심지어 자신조차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지만 끈덕지게 남는 것이 욕망이다. 문득, 작년에 있었던 <잡년행진>이 떠오른다. 뒤섞인 욕망들의 틈으로 어떤 얼굴이 모습을 띈다. 그 얼굴은 때로는 자신조차 신뢰하기 힘든 것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얼굴을 통해 뒤섞인 욕망에 대해 분석할 수 없다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듯한) 얼굴은 신뢰할 수 있을까? 욕망의 가면은 누구도, 하물며 자신도 완전히 벗겨낼 수 없다. 욕망이 타인을 통해서만이 드러난다고 할 때,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혹은 드러나는) 욕망은 없다 (그것이 자살이나 살인이라 할지라도). 욕망은 변형되고 다른 욕망이나 가치로 전이된다. 때문에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날고기같이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욕망에서 어떤 불신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살고자 하는 (척 하는) 욕망에서. 이것이 욕망의 딜레마인 듯 하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믿을만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얽매여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욕망이 어떤 식으로든 삶의 방식을 결정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핍된 욕망을 채우는 것을 포기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욕망과 얼굴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도와 안으로 곪아 들어갔다. 얼굴이 더욱 단단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가치라고 일컬어 지는 것들-체면, 지위, 고상함과 같은-은 모두 그럴싸하게 욕망을 채워주는 듯 포장되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물론, 내 주변인들도 나에게서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채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포기했더라면, 혹은 내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포기하게 만들었다면 나는 덜 이중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가 그 기대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했던 셈이다. 이 모든 순환의 고리가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결국, 욕망의 보상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또다시 그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 할거라는 막연한 생각-혹은 저주-을 했었다.

고독은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자신의 근성을 숨기고자 하는 것, 인간적인 근성에 대한 두려움,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열망, 결국 자신의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고독의 열정이 삶의 가치로 전환될 때, 거기서 틈이 생긴다. 왜냐하면 삶의 가치에는 무엇보다도 방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질문에 어느 정도는 답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결핍된 욕망을 어느 정도 보상해준다. 욕망이 욕망을 보상해 줄 일은 결코 없다. 두려움은 자신을 고립시킬 때 비로소 덜하다. 그 고립은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의 고립이 아니라, 감정적 고립이다 (물리적 고립이 감정적 고립을 돕긴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감정적 고립은 단순한 소통의 부재도, 관계를 끝장내는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뒤틀린 욕망을 증오나 애착으로, 일대일로 덤벼들려고 할 때 그 싸움은 질 것이 너무도 뻔하다. 아예 그것들로부터 고립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것은 끈질긴 것이므로, 관계 안에서의 의도나 계산보다는 환원이 필요하다. 그리움은 적절한 환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넓은 의미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이란 사랑 자체의 열정이다. 그리고 그 열정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이다.

고독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강렬한 욕망이었다. 행복한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나는 몇 가지 기억의 장면들을 붙일 수 있다. 지극히 사소하지만 너무도 압도적인, 끊임없는 감정들로부터의 해방, 그로인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던 시간들, 비인간적인 것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들, 감정적으로 침범받지 않는 일시적이어서 매력적인 장소들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억들로부터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삶의 내용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나는 감수성에 대해 눈치보지 않을 것을 여전히 되뇌이게 된다. 사람들이 쉽게 이름 붙이는 것에 대해 (감성에 대해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아니면, 우리는 감성에 대해 묘사하는 언어가 너무나 적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그것은 위선일 뿐이다. 어떤 이유로도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척을 할 필요는 없다. 위협을 주는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있다면, 돌아가거나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벗어날 것을 강하게 다짐한다. 머뭇거림없이.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함께할 누군가가 있을 때 주저없이 함께 하고 싶다. 그것이 일시적이고 간헐적이라 할지라도. 장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시간은 장소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함께한다는 것은 연속적일 필요도, 대단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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